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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범 국장, 군청 내부게시판에 작별 인사 남겨

김시범 의령군 경제문화국장이 퇴직을 앞두고 의령군 모든 공직자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30일 의령군청 공무원 내부게시판에 김시범 국장은 '공로연수에 들어가면서'라는 편지글을 올렸다. 김 국장은 40년 넘는 공직생활의 소회를 50페이지 분량의 글과 사진으로 구성해 남겼다. 이 편지에는 의령군 주요 역사적 고비마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했던 한 공무원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해 후배 공무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김 국장은 81년 무더웠던 여름날 대학 진학의 꿈을 뒤로 하고 호구지책으로 시작했던 공직이 평생 직업이 됐다고 했다. 마음을 그대로인데 어느새 머리는 반백(半白)이 되어 이제 공로(功勞)연수에 들어가지만, 말이 좋아 공로 연수이지 '사실은 아무 일도 해 놓은 것이 없이 헛되어 늙었다'라는 '공로(空老)'가 된 처지라고 고백했다.

80년대 주요 사무용품인 주판을 배우기 위해 상고 출신 방위병에게 주산을 배운 일, 사무실 등사기 롤러 잉크 정리와 숙직 시 연탄불 갈기의 막내 임무, 당직 순찰시계를 차고 다니며 두 시간 간격으로 마을 순찰하기, 우천 시에 투명 유리병에 고인 빗물 눈금으로 강우량 확인해 각 읍면에 전통(傳通)으로 보고 하기, 봉급날 노란 월급봉투에 십 원짜리 동전까지 넣은 7만 원의 봉급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퇴근하는 기분 묘사 등 '흑백사진'과 같은 지난 사건들을 재밌게 소개했다.

한편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도 김 국장은 있었다.

 
 

82년 4월, 일명 '우순경사건'이라 불리는 궁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통령이 현장에 방문했고, 사고수습에 의령군 모든 공무원이 나설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김 국장은 “80년대 궁류면에는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한동안 사고가 난 궁류면 운계, 평촌마을로 출장을 가면 논에서 울며 담뱃잎을 따고 있는 유족분들이 많아 마음이 저렸다”라고 씁쓸한 지난 기억을 회상했다.

03년 9월, 태풍 매미가 경남 지역을 휩쓸었다. 의령에도 교량·제방 붕괴, 산사태, 농경지·가축 유실, 인명 피해 등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어느 날 서암저수지가 위험하다는 연락을 받고 주민 대피를 위해 현장으로 긴급 출동을 가는 중 갑자기 물이 불어나 차가 붕 떠버리는 아찔한 사고를 겪었다고 했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와 목숨을 부지했지만 연이어 산사태가 발생하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고 김 국장은 몸서리를 쳤다.

이 밖에도 지난 40년 공직생활의 희로애락을 탁월하게 그려내며 의령군과 후배들에 대한 애정을 맘껏 표출했다.

 

김 국장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이렇다 할 발자취가 없어 그저 아쉽고 송구한 마음이 크다"라며 "큰 허물 없이 여기까지 온 것 모두 직원 여러분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러면서 "나의 고향 의령과 나의 후배 공무원들은 저의 자랑이다"라며 "나는 이제 마침표를 찍지만, 여러분들은 의령군을 더욱 새롭게 만드는 느낌표를 찍어달라"고 당부했다.

후배 공무원들은 댓글로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40년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님과 같이 걸었던 길도, 같이 걷지 않았던 길도 모두 추억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봄날 농막에 앉아 막걸리 한잔하며 뵙고 싶습니다” 등과 같은 훈훈한 반응으로 퇴직을 앞둔 한 선배 공무원을 배웅했다.

=======이하전문========

공로 연수에 들어가면서~~

金是範 입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81. 7. 여름.

궁류면사무소 면서기로 시작한 공직생활이 어언 40년 6개월.

대학 진학의 꿈을 뒤로 하고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시작했던 공직

(公職)이 평생 직업이 되었습니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어느새 머리는 반백(半白)이 되어, 이제 공로(功

勞)연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말이 좋아‘功勞’이지, 사실은‘空老’

가 더 적절(適切)한 표현이겠지요.

무슨 인사 말씀을 드리고 떠날까 하다가, 그냥 지난 추억들을 조금

적어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젊은 직원들에게는 케케묵

은 이야기로 비치겠네요.

그땐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공직의 출발, 궁류면사무소~

모든 게 부족했던 ′80년대.

유곡면 송산에서 궁류면사무소까지 5.5㎞를 자전거로 출·퇴근 했습

니다. 먼지가 풀풀 나는 자갈길, 완행버스 바퀴 자국 골을 따라 외줄

타듯 자전거를 달렸지요.

그때 면사무소 사무용품은 갱지‧미농지‧먹지‧기안지, 볼펜 정도가 전부

였습니다. 복사기가 나오기 전이라 먹지(墨紙)는 문서 복사(複寫)에 중

요한 역할을 했지요. 볼펜을 꾹꾹 눌러쓰면 석 장까지도 넣어 썼습니

다.

개인 주요 사무용품은 주판(籌板)이었습니다.

첫 보직이 재무계라 주산(珠算)이 필수였지요. 마침 면사무소에 근무

하는 방위병이 상업고등학교(商業高等學校) 출신 주산 유단자라 속성

(速成)으로 주산의 기초부터 배웠습니다. 두어 달 정도 연습하니까 업

무에 써먹을 정도가 되더군요. 갑류농지세, 을류농지세, 도축세 등

등……. 세목(稅目)이 생각납니다. 갑류농지세는 논에 부과하는 세금입

니다. 들판에 벼가 익으면 지적도와 지번별 조서를 들고 논두렁을 타

고 다니며 작황 조사를 했습니다. 7부작, 8부작 등으로 구분해서 세금

을 매겼지요.

초보(初步) 공무원 시절, 가리방(がり版)을 긁어 등사판(謄寫版)을 밀

때는 조심한다고 해도 금방 손이 까맣게 되었고, 겨울에는 꾸덕꾸덕

굳은 잉크를 난로에 녹여가며 롤러를 밀었습니다.

숙직 시에는 사무실 청소, 난로 연탄불 갈기, 국기게양(國旗揭揚) 등

할 일이 많았습니다. 또 눈비가 오면 강우량, 적설량을 매시간 군에 보

고했는데, 측정기구래야 별것 없고, 강우량(降雨量)은 투명 유리병에 고

인 빗물 눈금으로, 적설량(積雪量)은 자를 세워 쟀습니다.

각종 결의대회 시 현수막(懸垂幕)은 화선지나 달력(뒷면)을 여러 장

이어 붙여, 선배 공무원이 큰 붓으로 구호(口號)를 적었고, 먹물이 마르

면 장대에 매어 드는 것은 우리 몫이었지요.

군과 읍·면 간 공문 수발(受發)은 각 읍·면 문서 체송원이 시간 버

스를 타고 직접 하였습니다. 팩스도 없었기 때문에 긴급한 공문은 군

에서 전 읍·면에 전화로 전통(傳言通信文)을 보냈고, 읍·면 직원들은

급히 받아 적었다가, 다시 정서(正書)를 했습니다. 태풍이나 집중호우

시엔 하나뿐인 행정 전화통에 불이 났지요.

봉급날에는 총무계 차석이 단협(단위농업협동조합)에서 돈을 찾아와

노란 월급봉투에 십 원짜리 동전까지 세어 넣어 지급했습니다. 그때

봉급이라 해봤자 본봉이 4만 얼마에 이것저것 수당을 보태서 총 7~8만

원 정도, 여기서 뗄 거 떼면 실 수령액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래도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퇴근하는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82. 3.~′82. 5. 부산 양정에 있었던 경남지방공무원교육원에서 8주

합숙 신규교육을 받았습니다. 점심 식사 때는 먼저 운동장에서 국민체

조를 하고 식사를 했는데, 돌아서면 배고픈 한창 때라, 미리 대열 후미

에 섰다가 체조를 마치면 바로 뒤돌아 식당으로 달려 한 그릇 먹고,

다시 줄 서서 또 한 그릇 먹고 그랬네요.

생활관은 미군용 시설로 비닐하우스 비슷하게 생긴 퀀셋(Quonset) 막

사(일명 콘센트)였는데 내부 바닥은 다다미 침상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취침 전에는 군대식으로 일석점호(一夕點呼)를 실시했고, 취침 후 가끔

울타리 틈으로 통닭을 시켜 먹기도 했지요.

′82. 4. 26. 너무나 안타까운 궁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고수습에 선배 공무원들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그때는 의

령에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무더위 속에 진득한 담뱃잎을 따

서 져 나르고, 담배굴에 매달아 불 때서 말리는 매우 힘든 농사였습니

다. 한동안 운계·평촌마을로 출장을 가면, 논에서 울며 담뱃잎을 따고

있는 유족분들이 많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우산 헬기장 정비도 생각나네요.

당시 헬기장은 지역 주요 향토방위 시설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우산에

임도가 없었으니까 헬기장까지는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낫 들

고 페인트통 짊어지고 궁류 정동(正洞)마을 계곡에서부터 출발, 희미한

옛 산길을 더듬어 올랐습니다. 잡목지대를 지나 8부 능선쯤에 도달하

면 키를 넘는 철쭉이 빽빽이 들어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속

을 요리조리 뚫고 올라가면 마침내 정상이 나왔지요. 헬기장 풀과 주

변 잡목을 제거하고 字 블록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면 임무 끝!

그때 일을 마치고 구워 먹은 돼지고기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매월 25일은 정례반상회(定例班常會)의 날이었습니다.

8~90년대 정례반상회는 정부 시책을 홍보하고 주민여론 및 건의 사

항을 수렴하는 소통 창구였습니다. 군에서 수령한 반회보를 자전거 짐

받이에 단단히 묶어 마을로 나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오토바이가 보

편화되기 전이라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지요. 담당마을이 가까

우면 좋은데 거리가 멀면 갔다 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길은 비포장이지, 특히 궁류면 벽계, 대현마을은 면소에서 멀기도

하지만 동네가 산 위에 있어 오르막길엔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습니

다. 깜깜한 밤, 앞바퀴에 부착된 발전기 라이트는 속도가 줄면 불빛도

희미해져 일정 속도 이상 열심히 밟아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자갈길

에 미끄러져 무릎도 몇 번 갈았네요.

▢ 군(軍) 복무 시절

′83. 2. 24. 입대(入隊)를 했습니다.

면서기를 20개월이나 하다가 갔으니까 나에게는 군대도 공직생활의

연장(延長)처럼 느껴졌습니다. 군 생활 이야기 조금만 소개합니다.

창원 39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충남 당진(唐津)에 자대(自隊) 배치

를 받았습니다. 자대 배치 첫날 저녁 내무반에서 하늘같은 고참들에게

신고를 마치고 식당으로 이동, 특별히 수제비를 먹었습니다. 신병이 오

면 환영하는 의미에서 수제비를 끓여 주는 게 우리 부대 취사반의 전

통이라더군요.

내가 근무했던 충남 당진은 지금은 시(市)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전형

적인 농촌이었습니다. 비산비야(非山非野)! 라고, 산도 아니고 들도 아

닌 그런 지형, 해안선을 따라 갯벌과 염전(鹽田)이 참 많았습니다. 산

정상 초소(哨所)에서 바라보는 서해안 저녁노을이 참 멋있었지요. 우리

나라 서해바다 일출 일몰의 명소인 왜목마을이 바로 코앞이었는데 정

작 그때는 몰랐었네요.

이등병 시절.

그날은 포대장실 청소 당번.

포대장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대에 청소도구를 챙겨 들고 나 혼자 포

대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으니 자유로운 마음에 절로 노

래가 나왔습니다. 그때 가수 허영란의 ‘날개’라는 노래가 한창 히트

치던 때였는데, 가사가 ‘일어나라 아이야! 다시 한 번 걸어라~’로 시

작하지요.

빗자루로 바닥을 쓸면서 ‘일어나라~ 아이야~’ 하는 순간! 어두운

안쪽에서 포대장이 스르륵 일어나더니 나를 딱 노려보더군요. 혹시 자

기를 놀린 것으로 오해한 건 아닌지? 얼마나 놀랐던지~, 반사적으로

“충성” 경례를 붙였습니다. 다행히도 포대장은 “음!” 고개를 끄덕

하고는 말없이 퇴실하더군요. 그날 선곡(選曲)을 잘못해 십년감수했습

니다.

우리 부대는 산 밑은 행정 지역, 산 위는 사이트(SITE)라 부르는 작전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이 사이트에 근무했습니다. 밑에 졸병도 들

어오고 그곳 생활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난데없이 행정 지역 위병소

로 보직을 옮기라고 하더군요. 내려가면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딱딱한 위병근무가 싫어서, 가능하면 계속 여기서 근무하고 싶다

고 했는데, 잠시 후 인사계 주임상사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주임상사는

0.1톤의 체구에 인상이 헐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발에 땀

찬다고, 어떻게 뚫었는지 전투화 가죽에 벌집같이 무수히 많은 구멍을

내서 신고 다녔습니다.

행정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임상사께 경례를 붙이는 순간,

“이xx” 뻑! 불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튕겨 날아간 모자는 저만치 바

람에 데굴데굴 굴러가고, 군홧발에 쪼인트가 아주 작살이 났지요. 내려

가랄 때 군말 없이 가는 건데, 괜히 한마디 했다가 본전(本錢)도 못 찾

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포대장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분명 어제 일 때문

에 부른다는 생각이 들어, 까짓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포대장은 평소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냉정(冷靜)한 인상에, 무슨 생

각을 그리하는지, 항상 뒷짐을 진 채 지휘봉을 까딱거리며 한 자리를

왔다 갔다 하곤 했습니다.

“너 어제 인사계한테 많이 맞았다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위병소 가기 싫은 이유가 뭐야?”

“위병(衛兵)보다는 현 보직 포병(砲兵)이 저의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좋아! 여기 있도록 해!” 하시더군요. 뜻밖의 상황에 멀뚱히

있는데,

“너 집이 어디야?”

“경남 의령입니다.”

“나도 의령이야!”

“……”

“됐으니 가봐!”

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고향 분 덕을 톡톡히

봤네요. 그때 의령 어딘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바짝 쫄아서 물어보

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헛기침해가며 근무지로 돌아왔지요.

궁금해서 내 입만 쳐다보는 동기들한테 그랬습니다.

“야! 너희들 걱정 하지 마라. 내 안 내려간다!”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 되긴~, 그냥 당당하게 이야기했지!”ㅎ

그때는 매년 동계 한미 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경기

도 어느 시골 들판에서 숙영(宿營)을 하게 되었는데 나에겐 어릴 때부

터 익숙한 농촌 환경이었지요. 나의 장기(長技)를 십분(十分) 발휘하여

야전삽으로 논바닥을 깊이 파내 여기저기 짚과 마른풀을 잔뜩 긁어모

아 두껍게 깔았습니다. 그 위에 판초 우의로 텐트를 치고 가장자리는

흙으로 북을 돋아 완벽한 난방공사를 했지요. 하지만 칼바람은 여지없

이 텐트 속으로 들어왔고 아래턱은 밤새도록 덜~덜~덜~, 그래도 바닥

에 깐 짚 덕을 톡톡히 본 밤이었습니다.

′84. 7. 바야흐로 군 생활도 18개월로 접어들어 반환점을 돌고, 서열

도 중고참으로 여유가 있을 즈음, 불행(?)하게도 건군 36주년 국군의

날 행사 병력으로 차출(差出)되어 버렸습니다. 그땐 앞으로의 훈련이

어떨지? 좀 힘들 것이라는 정도 외는 별 생각이 없었지요.

먼저 우리 사령부 소속 각 부대 차출 병력이 경기도 오산(烏山)에 집

결하여, 한 달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이건 뭐 말이 훈련이지 훈련 대부

분은 그냥 얼차려였습니다. 훈련 군기가 아주 살벌했지요. 8월 그 무더

위에 연병장 옆 야전 막사에는 선풍기도 하나 없어, 그야말로 찜통이

나 다름없었습니다.

취침! 소리와 함께 총총히 드러누우면 등허리는 금세 땀으로 젖어 합

판 바닥에 쩍쩍 붙었지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 건 사회에서의 일

일 뿐, 온종일 훈련에 초주검이 되어 뒤통수가 바닥에 닿자마자 곯아

떨어졌습니다. 10분도 안 되어 여기저기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잠결에 ‘일병! ○○○!’ 관등성명 대는 놈까지 다양했습니다.

하루 중 유일한 낙(樂)은 휴식 시간에 PX에서 두유(豆乳)를 하나 사

서 먹을 때였습니다. 그때 월급이 아마 3~4천 원 정도 되었네요.

그렇게 오산에서의 한 달 훈련을 마치고, 이제 서울 여의도광장에 전

군(全軍) 부대가 집결, 본격적으로 또 한 달간의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제병지휘관(諸兵指揮官)은 육군 중장(中將)이었습니다. 원스타가 직접

지휘봉을 흔들며 대열(隊列) 주위를 돌고 있으니 현장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종일 열병(閱兵)과 분열(分列)로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지요. 게다가 원산폭격, 선착순 등 그놈의 얼

차려는 왜 그리 많은지, 그런데 이 선착순(先着順)이 문제였습니다. 나

는 원래 달리기에는 별 소질(素質)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도 달리기 잘해서 상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으니까요.

“저기 동쪽 전방에 보이는 탱크! 좌에서 우로 선착순 5명. 실시!”

진짜 입에서 연기가 나도록 뛰어봤자 5등 안에 들 수는 없었습니다.

계속 소득 없이 돌다가 결국 작전을 바꿨습니다. 어차피 등수 안에 못

들 거 괜히 힘만 뺄 것 없이, 끝날 때까지 뒤에서 일정한 경제속도로

뛰는 거였죠. 그런데 이것도 자주 하니 이제는 ‘뒤에서 개기는 놈

들’로 낙인찍혀 또 작살이 났지요.

어쨌든 덕분에 ′84. 10. 1. 국군의 날 기념행사, 서울 중심가 시가행

진도 해봤네요. 지나고 보니 가슴 뿌듯한 추억인데 그때는 정말 지옥

이었습니다. 하여튼, 나름 군 생활 재미있게 하고 ′85. 8. 29. 만기 전

역하였습니다.

▢ 본격적인 공직생활~

궁류면 복직(復職) 3개월 만에 군청 재무과로 발령이 났습니다. 군청

당직실에 비치된 개인별 출근부(出勤簿)에 당당히 도장을 찍고 본청 근

무가 시작되었지요. 그때는 군과 읍면 간 인사교류가 활성화되기 전이

라 면서기가 군서기 되는 게 무척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는 뒤에 알았습니다. 재무과 결원 보충을 위해 면 직원 중에서 인문고

졸(人文高卒)․ 병역필(兵役必)․ 최연소자(最年少者)를 찾았는데 내가 딱

그 조건에 맞았다더군요. 유곡에서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는데, 겨울

에는 무릎과 가슴 옷 속에 신문지를 대고 찬바람을 막았습니다. 그 시

절 모든 일이 처음 해보는 거라 배워가며 하려니, 별을 보며 퇴근하는

게 일상(日常)이었죠.

그때 내 업무는 현 재산관리계 업무(국·공유재산, 물품, 청사, 차량),

국비 공무원 봉급, 국비전도자금 등이었습니다. 이건 뭐 딴생각할 겨를

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나의 공직생활 중 첫 번째 고비가 그때

가 아닌가 합니다. 일을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일과 사투(死鬪)를 했다

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당시 재물조사를 하면 최종 집계작업을 하는데, 주산으로 계산을 하

니까 사무실에서는 전화 때문에 작업이 어려워 집에 들고 가서 했지

요. B4용지 두 장을 옆으로 이어붙인 실과소읍면 품목별 집계표를 큰

판에 펴놓고 밤이 새도록 주산을 놓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

다.

본청 연말정산도 경리계에서 했습니다. 연말정산 신고서와 의료비 등

증빙서류를 취합해서 군청 기사실 방을 빌려 한 보름 정도 수작업을

했습니다. 지금 군청 동편 마당 은행나무 바로 옆에 조그만 기사실이

있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국·공유재산, 물품증감현재액 보고 등 시군

집계작업을 위해 집계표와 증빙서류를 한 보따리 싸 들고 창원시내 여

관에서 3~4일 정도 합동 작업을 했습니다. 의령은 주로 밀양, 창녕, 함

안과 한 방을 썼지요. 작업을 가면 사무실 일은 잠시 잊고 밤에는 우

리끼리 소주도 한잔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국·공유재산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등 민사소송이 서

서히 생기던 무렵입니다. 지금은 법무 담당에서 소송업무를 지원하고

우리 군 고문변호사도 있지만, 그땐 담당 부서에서 직접 소송을 수행

했습니다. 소장(訴狀)이 접수되었는데 민사소송절차도 모르지, 청 내 어

디 물어볼 데도 없지, 해서 무작정 마산지방법원 주변에 있는 어느 변

호사사무실을 방문 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사무장이 내가 너무 모

르니까 안쓰러웠는지 소송이란 게 뭔지 개념에서부터 소송절차, 답변

서 쓰는 요령까지 아주 상세히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게 배워서 급한

대로 답변서를 쓰고 의령군 소송대리인으로 재판에도 참여하고 그랬습

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머리를 식힐 겸 틈틈이 등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한번은 이효열 차석님이 지리산(智異山)을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같이

한 번 가자고 해서 1박 2일로 천왕봉도 다녀오고, 인근에 있는 합천

매화산도 자주 갔었네요. 차석님이 가끔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어쩌다 내가 윗사람한테 꾸지람을 듣고 풀이 죽거나, 불평을 할라치면,

‘김 주사! 공무원은 원래 윗사람한테 욕먹는 재미로 일하는 거다! 그

재미 아니면 어떻게 일하겠노!’하셨지요.

매사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당시 군청 1층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화(逸話) 하나 소개합니다.

모(某) 과장님, 강(姜) 선배, 이(李) 선배(운전직) 세 분이 한꺼번에 볼

일을 보면서 생긴 일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본청 화장실은 세 칸으

로 되어있었습니다.

姜 선배가 화장실을 가는데, 마침 조금 앞에는 그 과장님이 먼저 화

장실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과장님은 맨 안쪽 칸에 들어가셨고,

姜 선배는 그 옆 가운데 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姜 선배가 가운데

칸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뒤따라오던 李 선배가 보았고, 李 선배는 姜

선배 옆 첫 번째 칸으로 들어갔습니다. 李 선배는 그 화장실에 자기와

姜 선배하고 둘만 있는 줄 알았지요.

조용히 각자 볼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과장님 칸에서 “타타타

타~!”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 과장님께서 속이

매우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姜 선배는 못 들은 척 숨을 죽이고 있는

데, 평소 장난기 많은 李 선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지요. 둘은 둘

도 없는 친구사이.

“야 이놈아! 언가이 처묵지! 뭘 뭇길래 이 난리고?”

난처한 姜 선배는 대답도 못하고 황급히 나와 버렸습니다. 좀 있다가

姜 선배가 기사대기실에 가보니, 李 선배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를 손가락질하며 킬킬 웃더랍니다.

“니 인자 죽었다. 임마!”

“뭐, 그기 무슨 소리고?”

“바보야! 아까 그거, 내 소리 아니거든~”

“??????”

지나고 보니 예산, 회계 분야에 오래 있었네요.

예산계 차석으로 본예산 작업을 세 번 했습니다. 9월부터 다음 연도

본예산 작업을 시작하여 기준경비, 필수 경상경비 등을 먼저 편성하고,

본격적인 작업은 10월 중순부터 군민문화회관 2층 향우의 방에서 했습

니다. 매일 오전 사무실로 출근해서 급한 업무를 처리해놓고 군민문화

회관 작업장으로 갔지요. 그날그날 세입․세출 입력내용을 일일이 업무

수첩에 기록을 했다가, 퇴근 시에는 PC 마감 자료와 대조해서 당일 누

계금액이 맞는지 반드시 확인을 거쳤습니다. 9월 남산(南山)의 나뭇잎

이 푸를 때 왔다가, 푸른 대밭만 동그랗게 남고, 낙엽(落葉)이 모두 지

면 예산작업도 끝났습니다.

′97. 1. 1. 예산계에서 경리계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해 1월부터 국내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기 시작하더

니 결국 ′97. 12.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당시에는 공사계약 시 계약

상의 시공 의무 이행을 위한 시공연대보증인 제도를 시행하던 때였습

니다. 계약상대자가 공사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계약상대자를 대신하

여 연대보증인이 공사이행 의무를 지는 것이었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군 계약업체를 상대로 법원의 채권압류․ 전부

명령 등이 떨어지면서 부도회사가 발생하더니, 하반기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부도로 인한 연대보증인 보증시공

이 주요 현안 업무가 되었습니다. 선금 정산, 타절 정산 등 대금지급과

관련하여 보증기관 방문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네요.

′80~′90년대는 매월 새마을 조기 청소를 실시했습니다.

새벽에 군청 마당에 집결해서 인원 점검을 하고, 부서별로 담당구역

에 나가 청소를 했습니다. 군청직원들이 빗자루를 들고 시내를 청소하

던 모습이 당시에는 아주 낯익은 풍경이었지요.

사무실 집무검열(執務檢閱)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바닥을 쓸고 닦고 창문틀에 올라 신문지나 걸레로 창유리를 박박 문

질러댔습니다. 책상 안팎까지 깨끗이 정리하고 서랍을 빼놓은 상태로

검열을 받았지요. 실과 주무 계장들이 검열관이 되어 점수를 매겼습니

다.

오래전에 사라진 당직 순찰시계(巡察時計)가 생각나네요.

당직 시에는 군청 내·외부의 지정된 주요 지점에 두 시간 간격으로

이상유무(異常有無) 순찰을 하였습니다. 당직 시계를 들고 다니며 순찰

로의 끝에 달아놓은 열쇠로 낙인(烙印)을 하는 건데, 이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순찰시계를 이불에 싸서 방바

닥에 패대기를 쳐 일부러 고장(故障)을 내기도 했지요.

행정 사무환경은 정말 많이 발전했네요. 수동타자기를 쓰다가 전동타

자기로 바뀌고, 다시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컴퓨터가 글씨를 대

신하니까 보고서 작성에 대한 부담이 없지만 옛날에는 기안문, 보고서,

차트, 각종 부책 표지 등을 모두 손으로 썼습니다. 글씨가 나쁘면 문서

의 품격이 떨어져 버리니 모두 멋있게 쓸려고 노력을 했지요. 글 크기

에 따라 표지는 붓펜, 문서 제목은 사인펜, 본문은 플러스펜 등으로 사

용했습니다. 그때 군청에는 명필이 몇 분 계셨습니다. 주요 보고서나

현황판 등은 담배 한 보루 사 들고 이분들께 부탁을 드렸지요.

글씨 관련, 오래전 지적직(地籍職) 우리 고향 선배님 이야기입니다.

그때도 당직 중 동향이 발생하면 동향 보고서를 작성해서 다음 날 아

침 행정계에 전달했습니다. 마침 선배님이 숙직 중 사고가 발생하여

동향 보고서를 작성했던 모양입니다. 내 자리에서 업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만치 선배님이 구시렁거리며 내게 오더니 동향 보고서를 내

놓으면서 하시는 말씀.

“범아, 이거 좀 새로 쓴더라!”

“와 예?”

“행정계 갔더니 깨끗이 정서(正書) 해오라 카네! 나는 최대한 정서한

건데, 성의 없이 써왔다고 억수로 멀쿠더라!”

그 선배님은 원래 지적공사 출신으로, 현장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필체였거든요. 나도 좋은 글씨는 아닌데 그래도 내가 쓴 걸 들고 가며

킥킥 웃던 모습이 엊그제 같습니다.

′98년 3월, 6급으로 진급하여 칠곡(七谷)․ 유곡(柳谷)․ 정곡(正谷), 三

‘谷’면을 차례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때는 시·군에 복지시설이 부족

해서 그랬는지 행려자(行旅者)가 많았습니다. 정신이상자나 걸인들이

거리를 헤매다가 재워달라고 면소를 찾아오거나, 파출소에서 발견하고

면소로 인계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추운 겨울 내가 숙직할 때 꼭 이런 행려자들

이 잘 오더군요. 칠곡면에 재무계장으로 있을 때는 늦은 밤 얼굴이 새

까맣게 탄 깡마른 노인이 찾아와 좀 재워달라고 하더군요. 두말 안 하

고 숙직실에 재우고 아침에 차비까지 줘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곡면에서도 당직을 하는데, 한 10시쯤 되었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이번에는 4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었습니다. 옷차림

새도 이상하고 아무래도 정상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겁먹은 듯

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더군요. 숙직실에 이불을 깔아

주고는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했더니 그대로 들어가 잤습니다. 다행히

신원이 확인되어 행려자의 오빠와 통화가 되었는데,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오겠다더군요. 다음 날 아침 오빠가 왔는데, 그동안 찾느라 얼

마나 애를 태웠는지 얼굴에 쓰여 있더군요. 동생을 보더니 ‘여기서

뭐 하노! 빨리 집에 가자!’며 손을 꼭 잡고 나갔습니다.

′99.11.정곡면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여기서도 당직을 하는데 한 9시쯤 되었을 겁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

더니 누군가 조용히 면소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한 40세 정도나 되

었을까? 누비를 입고 걸망을 진 단신(短身)의 비구니 스님이었습니다.

지금 만행(萬行) 중인데 여기 사무실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없겠느냐

하더군요. 만행 길에 나선 지 여러 날 되었는지 밤송이 같이 자란 반

백(半白)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 저기 숙직실에

서 주무십시오.’ 했더니, 여기 의자에 앉아 밤이슬만 피하면 충분하다

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괜찮으니 안에서 주무시라 했지

만, 스님이 계속 사양하길래, 어쨌든 나는 주인이고 스님은 손님인데,

손님을 밖에 재울 수는 없지 않느냐! 해서 결국 스님은 안에 들어가고

나는 사무실 난로 옆에서 눈을 붙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스님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고맙다면서 합장(合掌)을 하고는 떠났습니다.

′00. 3. 의령읍 구)벽화초등학교에 마산대학 의령캠퍼스가 신설되었

습니다. 늦게나마 대학 진학 기회가 생겨 유통정보과 1기로 들어갔는

데, 대부분 군청직원이었고 농협, 지적공사 직원 등 총 43명이었습니

다. 책가방을 놓은 지 20년이나 지나 직장 퇴근 후 학교에 가려니 처

음에는 상당히 귀찮았습니다. 한두 달 시간이 지나니 점점 습관이 되

고 그런대로 재미도 붙더군요. 그렇게 해서 ′03. 8. 뜻깊은 학위를 수

여 받았습니다. 이때 새천년동창회를 결성하여 국내외 여행도 자주 다

녔는데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중단되어 아쉽습니다. 지나고 보

니 야간대학 다니던 그때의 추억도 새롭습니다.

의병제전(義兵祭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지금은 축제가 거의 야간 행사 위주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전야제만

야간에 이루어지고 본 행사는 주간(晝間)에 전 군민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야제 시에는 북놀이, 축등행렬, 축등

점화, 불꽃놀이와 야시장(夜市場) 운영으로 모처럼 의령 시내가 사람들

로 북적거렸습니다. 부서별로 담당 행사를 마치면 야시장 군데군데 모

여앉아 동동주에 파전을 먹었습니다. 4. 22. 본 행사는 18장군, 각급 학

교, 사회단체, 농악대, 읍면 가장행렬단 등이 09:00 의령고를 출발, 시

가행진 후 의령공설운동장 도열을 완료하면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스

텐드 관람석은 군민들로 빈 틈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

당시는 마라톤, 테니스, 읍면 대항 축구․씨름․줄다리기 대회 등 체육행

사도 다양하게 열렸습니다. 씨름은 운동장 동편에 임시 씨름장을 만들

어서 했는데 항상 관중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의령에 젊은 사

람들이 좀 있어서 체육행사도 가능했는데, 갈수록 축구, 씨름 등은 선

수확보에 애를 먹었지요. 점심은 읍면별로 스텐드 위에 솥을 걸어 국

밥을 끓여 먹었습니다. 희한하게 의병제 전후(前後)로 비도 잘 오고 바

람이 잦았습니다. 식사 중 돌풍으로 흙먼지가 날아오면 모자나 손바닥

으로 밥그릇을 덮고 그랬지요.

쌀 증산! 병충해 방제!

농정(農政)이 군정(郡政)의 중심이던 그 시절, 벼‧보리 베기 등 농번기

일손 돕기는 공무원 주요 업무 중 하나였지요. 모내기 시에는 무논에

일렬횡대(一列橫隊)로 엎드려 모를 심었습니다. 손이 늦으면 허리 한

번 펼 겨를이 없고, 넘기는 못줄에 뺨도 많이 맞았습니다. 일 중간에

논두렁에 걸터앉아 새참을 먹고, 점심은 냇가에 빙 둘러앉아 국수도

먹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꼭 추석을 전후해서 태풍이 많이 올라와 논

이 침수되고 벼가 쓰러졌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푹푹 빠지는 차

가운 논에 맨발로 들어가 벼(倒伏벼)를 세워 묶었습니다. 미처 시기를

놓치면 쓰러진 채 싹이 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농사는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문제, 너무 안 와도 문제입니다. 지금은

수리(水利)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웬만큼 가뭄이 와도 물 걱정이 없지

만, 그때는 가뭄이 심하면 양수기란 양수기는 총동원하여 하천의 물을

퍼 올려 다단양수(多段揚水)를 했습니다. 공무원들이 주민들과 함께 철

야(徹夜)로 비상근무를 했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도 한계가 있어서 해

갈(解渴)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논바닥은 갈라지고 나락은 타들어 가

는데 하늘엔 도저히 비올 기미가 없으면 급기야 기우제(祈雨祭)를 올리

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유곡면 주관으로 신덕산(新德山)에서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

었습니다. 함안에 거주하는 유곡 출신 어르신께 제문(祭文)을 부탁하였

고, 어르신께서는 연로한 몸으로 직접 행사에 참석하셨습니다. 총무계

장이 읽기 쉽도록 제문에 토를 좀 달아주십사 부탁을 하니,‘미리 다

토를 달아놨으니 걱정 마시게’하시더랍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제

문을 펼쳤는데, 글쎄 한글 토는 하나도 없고 한문(漢文)을 끊어 읽는

부분에 까만 점만 콕콕 찍혀있더랍니다. 부랴부랴 한글로 다시 토를

달고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하필이면 이분이 하산(下山) 중 실족(失足)

으로 나뭇가지에 한쪽 눈을 찔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면(面) 입장

이 정말 면목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다 자기 불찰(不

察)이고, 이 나이에 눈 하나쯤 안 보여도 괜찮으니 면에서는 전혀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매년 8월이면 을지연습(乙支鍊習)을 실시했습니다. 연습 첫날 전 직원

비상소집을 시작으로 종합상황실, 통제반, 4층 회의실 실시부에서 일제

히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을지연습 때면 항상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날 군수님께서 격려차 실시부를 방문하셨습니다. 천천히 실시부

를 돌면서 한 직원 앞에서 딱 멈춰, 무슨 반 소속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직원은 토목직으로 복구반 소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질문

에 ‘무전 3반’이라고 답했고, 군수님은 또 ‘그래, 수고 많구만’ 하

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연히 군대 무전병의‘無電’으로 알아들으

셨던 겁니다. 사실 그 직원이 말한 ‘무전’은 얼떨결에 현재 자기가

사는 의령읍‘茂田 3반’을 말했던 겁니다. 군수님이 내려가신 후 다

들 배꼽이 빠졌지요.

′03년 9월. 태풍 매미가 부산·경남지역을 휩쓸었습니다.

의령에도 교량․ 제방붕괴, 산사태 및 매몰, 농경지 유실 등 엄청난 피

해를 입었습니다. 그때가 건설과에 근무할 때였는데, 저녁에 서암(書巖)

저수지가 위험하다는 연락을 받고, 저수지 바로 아래가 우리 동네라

걱정이 되어 현장으로 출동하는 직원들과 함께 차를 탔습니다.

가례초등학교 앞에서부터는 도로에 물이 넘쳐 차 범퍼로 물을 가르

며 천천히 가는데, 수성마을을 지나고 괴진교(槐津橋)를 건너 100m 정

도나 갔을까? 갑자기 물이 확 불어나면서 차가 붕~ 떠버렸습니다. 모두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나는 괴진(槐津) 방향, 일행은 가례(嘉禮) 방향으

로 뛰었습니다. 그때 괴진교 위쪽 제방이 터지면서 일대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으나 강한 비바람으

로 온몸이 휘청거렸습니다. 게다가 산에서 굴러온 날카로운 돌들이 길

을 뒤덮고 그 사이로 황토물이 콸콸! 이게 도로인지 하천인지 분간이

안 가더군요. 평소 같으면 30분이면 갈 수 있는 우곡(牛谷)마을을 한

시간도 더 걸려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서암저수지 제방에 올라가 보니 수위(水位)가 까딱까딱하더군

요. 상류에서는 여전히 엄청난 물이 유입되고 있었고, 여수토 쪽은 방

수로가 터질 듯 물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동네 주민들께는 여차하면

산으로 피신하기로 연락을 취해놓고, 군에 상황을 보고하니, 양성마을

에 산사태 매몰 사고가 나서 119대원이 출동했다더군요. 동네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플래시 불빛이 깜박깜박 올라오더

니 잠수복을 입은 119대원 3명이 도착을 했습니다. 그들과 합류해서

곧바로 양성마을로 출발했는데, 서암저수지 제방 옆을 조금 지나니까

집채만 한 산사태 흙무더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밟아보니 푹

푹 빠지는 진흙이라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어서 산으로 우회(迂廻)해서

통과하자고 했지요. 지형을 아는 내가 앞에 서고 119대원 3명이 뒤따

랐습니다. 도로 측구를 건너 산으로 몇 발짝 들어가는 순간, 뒤에서

다급히 ‘후퇴!’ 하는 소리에 뒤돌아 무조건 뛰었습니다. 뒤에서는 우

르릉~ 하며 산이 무너져 내렸고, 그것이 길을 덮고 가드레일을 들이받

아 ‘뻥!’ 소리를 내며 옆으로 퍼지면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지요.

한 50m를 달려가다 뒤돌아보니 산사태가 바로 뒤에서 멈췄더군요. 도

로 위에는 이제 진짜 산더미만한 흙무더기가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때 119대원이 오늘 우리는 정말 천운(天運)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

해도 아찔하네요. 그들은 본부에 무전으로 현 상황을 보고한 후 바로

철수하였습니다.

그 시각, 군에서는 인력과 장비가 양성 사고 현장으로 출발을 했다더

군요. 한참 후 포크레인 2대가 앞에서 길을 내고, 그 뒤를 수많은 차량

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산사태를 치워가면서 양성 사고 현장

에 도착한 것은 아마 다음날 새벽 네다섯 시 정도였지 싶습니다. 그

시간에도 양성 마을에는 산에서 많은 물이 커다란 돌들과 함께 굴러내

려 오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그때 군, 관, 민 모두 재해 응급 복구에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산불 진화작업도 많이 나갔습니다.

헬기가 도입되기 전에는 연간 휴일 불문하고 최소한 네다섯 번 이상

은 출동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불이 이왕 날 것이면 한낮에 나든지? 대

체로 오후 늦은 시간에야 나는 바람에 불을 끄고 캄캄한 밤에 하산하

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창기의 산불 진화 장비는 주로 까꾸리(갈퀴)로 낙엽을 긁고 솔가지

로 불을 두드려 껐습니다. 이후 등짐펌프가 나오고 헬기가 도입되면서

진화가 훨씬 쉬워졌지요. 산속에서 한창 불을 끄고 있는데 바람을 타

고 머리 위로 불이 휘~익 번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고, 진화 중 헬기

물을 정통으로 덮어쓰기도 했습니다. 낙서면에 대형 산불이 났을 때는

맞불 작전까지 동원했었습니다. 불이 계속 확산하여 한밤중에 붉은 불

띠가 온 사방 산 능선을 길게 두르며 번져 나갔었지요.

지금은 웬만한 불은 헬기가 조기 진압하니까 출동이 많지 않은데, 그

때는 산불 비상 청내방송이 나오면, 즉시 옷을 갈아입고 현장으로 달

려갔습니다.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 모습만 봐도 큰 불인지 작은 불

인지 판단이 되었지요. 불 끄고 내려오면 두부에 막걸리로 목을 축이

곤 했습니다.

′03. 12. 공공시설관리사업소가 신설되면서 시설계장으로 보직을 받

았습니다.「종합사회복지관 및 국민체육센터」건립이 당면 현안사업(懸

案事業)이었습니다. 토목·건축 공사 업무 문외한(門外漢)이 대형공사를

맡고 보니 부담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타 시군 대형공사 추진사례 견학도 하고, 부지런히 발주(發注) 준비를

했지요. 토지 보상 협의차 창원, 진해, 마산, 부산 등지로 숱하게 다녔

습니다. 특히, 부지 내 매장문화재 시․발굴조사와 관련해서는 많은 발굴

비용, 그에 따른 본 사업지연 등 여러 난제(難題)가 걸려 있어, 문화재

청과의 협의 과정에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부지 성토 문제는 태풍

매미 때 관내 저·소류지에 토사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준설이 불가피

했던 관계로, 서암저수지, 내조소류지 등에서 준설토를 반입하여 성토

(盛土)했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준비해서 ′05. 8. 설계·시공일괄입찰공사(턴키)로

발주를 했습니다. ′07년 공사 마무리까지 장장 3년 9개월을 시설계장

으로 있었네요.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여곡절(迂餘曲折)과 난관(難關)

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열심히 일한 직원들 덕분에 공사를

잘 마무리 했다고 생각합니다.

′07. 9. 체육청소년담당 시절에는 탁구 교류차 중국 요성시(聊城市)

를 다녀왔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라고는 하나 없는 끝없는 평야

지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옥수수를 주렁주렁 걸어놓은

농가 모습은 우리 시골 풍경과 똑같았습니다. 건조한 지역이라 시내

아스팔트 도로에는 누런 모래 먼지가 두껍게 앉아 마치 흙길 같아 보

이더군요. 환영 만찬장 대형 회전 원탁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山海珍

味)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강한 향신료 냄새 때문에 원탁을 아무리

돌려보아도 집어 올만한 게 없더군요. 두부하고 나물 몇 가지만 먹었

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 곽 계장은 어찌나 잘 먹던지……. 현지인과 구

별 불가!! 그날 그 독한 술을 얼마나 먹었던지, 다음 날 겨우 일어났습

니다.

′16. 1. 고향 유곡면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재임 중 ′16년 제44회 의

병제전 읍면 농악 경연대회에서는 운 좋게도 유곡면이 대상(大賞)을 받

았습니다.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17. 2. 다시 군으로 들어와

서 여기까지 순식간에 세월이 갔습니다.

막상 옛 기억을 떠올리려니까 대부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괜히 쓸

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이제 인사를 마무리 하겠습니

다.

동료 직원 여러분!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이렇다 할 족적(足跡)이 없어 그저 아쉽고

송구(悚懼)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대과(大過)없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직원여러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

다. 그리고 저의 부족함으로 직원 여러분께 누를 끼친 부분은 이 자리

를 빌려 널리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기획예산담당관 근무 시 우연히 군청의 옛 사진(寫眞) 기록(記錄)에서

찾은 저의 젊은 시절 의령읍 가두행진 사진과 몇 개의 추억 사진을 기

념(記念)으로 첨부(添附)합니다.

다가오는 임인년(壬寅年) 새해,

항상 건강(健康)하시고,

뜻하시는 일들 모두 이루시기를 기원(祈願) 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年 12月

金是範 拜上

 

[사진첩]

공명선거 캠페인(플래카드를 들었네요)

왼쪽건물은 의령등기소, 오른쪽은 교육청 백산도서관 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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